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율리우스 카이사르 (문단 편집) == 행운 == 먼저 행운을 약간 우연 내지 미신으로까지 치부하는 동아시아 문화권과 달리, 서양에서는 고대로부터 행운을 성공을 위한 덕목들 중 하나로 보고 인생과 관련된 진지한 관점으로 접근했다는 문화적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로마에서는 패장을 처벌하지 않았는데 전쟁에선 가능한 모든 준비를 해야 하지만 결국 승패는 운에 달려있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는 패장을 가차없이 처형했는데 이런 고급 인력의 손실과 달리 실수를 만회할 의지에 불타는 장군들이 넘쳐난 로마에게 유리했다는 평가도 있다. 심지어 로마의 패장은 패전 자체로는 처벌받지 않았지만 전투 직전에 닭 모이 점을 치다가 불길하게 나오자 닭을 바다에 집어 던져버려 경솔하게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 때문로만 처벌받은 경우도 있다.] 당시 유명한 장군들에겐 fortuna, felicitas, felix 같은 행운과 연관된 별칭이 붙어다니곤 했다. 술라는 자기 스스로 존칭을 행운아라는 뜻의 Felix로 지어 술라 펠릭스라 했다. 장군보다는 문학가였던 키케로조차 위대한 장군이 갖춰야 할 필수요소 중 하나로 felicitas를 꼽기도 했다. ‘카이사르의 행운(Fortuna Caesaris· Felicitas Caesaris)’이란 표현은 당대와 그 이후에도 일종의 상용어구가 되다시피 할 정도로 강한 행운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으로 묘사된다. 당대인들에게도 운명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묘사된다. 많은 고대의 전기 작가들은 카이사르의 성공이 운명의 호의 덕분이라고 믿었다.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를 “자신의 운명을 알았고, 그 운명을 권력 쟁취의 동력으로 삼았던 슈퍼 휴먼”으로 그렸다. 플루타르코스는 “누구보다 자신의 운명에 강한 믿음을 가졌던 인물”로 카이사르를 묘사했다. 현대의 연구가인 에이드리언 골즈워디는 행운의 연속이라고 평할 만한 카이사르의 삶을 두고 “운명의 여신은 계속해서 카이사르에게 미소 지었다”라고 요약했다. '''아예 카이사르 본인부터가 “나는 운이 좋다”, "행운의 여신(Fortuna)은 나의 편"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로마 당대에도 이상적인 어머니로 뽑히는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가르침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 외에 2명의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어머니인 아티아, 스키피오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다. 가부장적인 로마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현모양처]]로 로마 역사 내내 칭송받던 3명의 어머니다.] 각종 기록에서 카이사르는 거의 자신의 행운을 종교수준으로 믿은 사람으로 그려진다. 자신의 외모를 포함해 거의 모든 측면에서 그는 허영에 가까울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다. 무엇보다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카이사르는 행운의 역할을 강조했다. “오늘 전투에선 적군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적군 안에 (운이 좋은) 카이사르가 있다면.”이란 문구도 카이사르의 말이다. 자신보다 운이 좋은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자신감이 넘치는 표현이다. 카이사르 본인의 운명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잘 드러난 사례로는 기원전 48년 겨울 항구도시 디라키움에서 벌어진 일화가 유명하다. 악천후로 선장과 선원들이 두려워하자 "걱정하지 마라, 너희들은 카이사르와 카이사르의 행운을 태우고 있다!"라고 소리쳤다. 기원전 48년 폼페이우스 잔당을 추격해 아프리카에 상륙할 때 그는 발을 헛디뎠는지 병사들 앞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당시의 기준으로는 매우 불길한 징조였기 때문에 모두가 웅성댔지만 카이사르는 넘어지자마자 모래를 움켜쥐며 “아프리카여! 드디어 내가 너를 잡았다.”라고 소리쳤다. 리더의 즐거운 목소리에 군단병들은 불안감을 떨치고 환호했다고 한다. 이런 장면들로 보았을 때 막무가내로 자신의 행운을 맹신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강하고 위기를 기회로 생각하는 긍정적이고 도전적인 성격이 극도로 강한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꼭 행운이 좋기만 한 사람이었냐고 하면 꼭 그렇다고 하기도 어렵다. 집안은 전통은 있었지만 돈 없고 한미해서 로마 서민들이 사는 수부라 외곽 지역에 살았고 아버지는 카이사르가 어릴 때 신발을 신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또한 알렉산더가 33세에 세계를 정복하고[* 어느날 카이사르가 책을 읽다가 갑자기 울었는데 친구가 "왜 그러냐"라고 하자 [[비육지탄|"알렉산더는 33살에 세계의 주인이 되었는데 동갑인 난 뭘 하고 있나"]]라고 한탄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스키피오도 20대에 정점을 찍었으나 카이사르는 40세가 넘어서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건 애초에 비교 대상이 잘못됐다고 보는 게 맞다. 예시로 나오는 알렉산더, 폼페이우스, 스키피오 모두 유의미한 군사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여건이 젊은 나이부터 가능했음을 고려해야 한다. 알렉산더는 당대의 강국에 해당하는 마케도니아의 왕자였고, 폼페이우스는 가문 대대로 전해지던 다수의 후원자들이 있었으며, 스키피오는 아버지가 군단 사령관이었고, 아버지 아래에서 종군했던 케이스다. 오히려 카이사르는 키케로나 루키우스 카이사르처럼 특수한 케이스들을 제외하면 소위 말하는 '명예로운 경력'을 착실히 쌓아가는 평균적인 로마의 정치인 코스를 탄 케이스이다.] 또한 전쟁터에서 수많은 위기를 겪어야 했고 본인이 죽을 뻔한 전투도 여럿 있었다. 그리고 최후에는 암살당해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 여러 사료에서는 3월 15일의 암살 직전 수많은 불길한 징조들과 아내의 악몽 등이 거론된다.] 죽기 직전 저녁식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죽음은 무엇인가'라는 토론에서 스스로 '아무 예상 없이 갑작스럽게 닥치는 죽음'이라고 꼽은 걸 보면 스스로에겐 행운일 수도 있겠지만. 카이사르 반대파가 전쟁에서 패배한 뒤 “패전은 운이 나빴던 탓이었다”라는 면죄부를 받기 위해 카이사르의 행운을 강조했다는 분석도 있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는 필리피 전투에 패해 죽기 직전 '''"가증스런 운명이여, 너도 행운(카이사르의 행운을 뜻함)의 편이더냐!"'''라고 했다. 당시 로마인들에게 행운, 운명은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신앙이었다. 결국 정적에게도 카이사르는 죽어서도 행운의 가호를 받는 슈퍼 휴먼으로 인식되었다는 것. 또한 카이사르가 막상 자신의 저술에선 행운의 역할을 최소한으로만 적었다는 점이 흥미로운 점이다. 카이사르가 정작 본인은 정쟁이든, 전투든 승리를 위해 철저한 준비에 매달리는 한편[* [[알레시아 전투]] 당시 카이사르 휘하 군단이 포위망을 요새화하는데 들인 노력이 대표적인 예이다.], 행운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신앙을 이용해 군단의 사기를 올리고 '프로파간다'로 써먹었다는 관점도 있다. 다시 말해 현실과 자신감을 구분할 줄 알고 요행에 기대는 성격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합적으로 보면 카이사르와 행운의 조합은 [[천생연분]]처럼 붙어 다녔고,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서 끝없이 회자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